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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019. 11. 17. 09:58




병증이 심화되지 않는다. 향유하지 않는 빌어온 언어가 휘발하고 지질한 사전이 열등감을 품고 있다. 혼자가 아니라 말했지만 나는 혼자다. 다시. 또 다시. 이것은 내 일기장에도 없었던 바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지만. 삶이 흔들렸다. 모서리가 닳은 식탁이 기우뚱거렸고 플라스틱인지 뭔지 가볍고 좋은 소리가 나지만은 않은 쌈장 그릇이 미끄러졌다. 와끌한 열기가 퍼진다. 각자의 생들이 펼쳐져 뒤엉킨다. 먼지 쌓인 시멘트 바닥이 신발 밑창 아래 매끈하다. 나는 그때야 정신을 다잡았다. 김도운이 마늘 조각을 꼬나 물었다.


고기 먹고 국물 먹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숟가락들이 맞닿는다. 쓰잘데기 없는 도운이가 시선을 내 눈에 맞췄고 대본을 들이밀었다. 애틋한 착각을 주는 것이 고마웠다. 대본 뭉치 위에는 이렇다 할 수 없는 크로키 몇 점과 김도운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유성 마카. 바싹 탄 고기의 표면이 목을 긁었다. 국은 너무 매웠다.


글을 늘여쓰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문단을 대강 잇고 또 이어가는 것이 생명을 잇는 것인지 잘라야할 꼬리인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혹은 마음에 들어할 지도 모르는 채 쉬지 않는 것이 글이 느는 것이니. 나는 마뜩잖고 김도운은 내 글을 꼼꼼히 읽었다. 나의 목에서 발견한 긴 손톱 자국이 내 글줄의 아래에 쳐져 있는 것을 보면 기뻤다, 꼴에.


문단마다 어째서인지 결론을 내린다. 사회에 좀처럼 녹아들지 않는 나는 인정이 인정이고 존재가 불인정이다. 이제 이 끄트머리에 불안정을 가지고 말놀음을 하는 것도 지쳤다. 불판 위 양파가 오그라들었다. 이것 봐, 나는 또 끝을 내려 하고 김도운같은 애들이 옷깃을 끌어 잡아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다. 뭐해. 다릴 꼬고 폰을 보고 있는 김도운을 불렀다. 불판에 음식물이 지나치게 달라붙지 않느냔 얘길 시시콜콜 하고 버섯을 뒤집지 않는 것에 쓰는 신경 새로 찬바람이 침입한다. 비로소 계절이 느껴져서 현실감이 왔다. 나는 거지 발싸개같은 로망스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행히 너를 만난 때가 생생하다. 무뎌졌다고 해서 돌아버린 것이 아니란 사실 적시에 눈물이 났다. 겨울이면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으니 나는 고개를 든다. 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아서, 문장과 비유가 건조해지지 않아서, 아직 절박하지 않고 어쩌면 미래를 꿈꿀 수 있을지도 몰라서 행복했다.


여기에 또 그런 말을 썼을테지. 과거의 나를 혐오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발상이 시든다. 시든 채로 살아왔다. 짧아지는 문장이 꼭 나의 명줄같았고 그럼에도 나의 생명줄이라 이제야 너에게 밝힌다. 김도운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지, 그게 너의 역할이지. 나의 병증은 너의 입을 막았고. 대신 도운이가 내게 전화를 건네주었다. 온도가 많이 느껴졌다.



십일 월 삼 일.

'줄거리를 만들지 않는 나는 평소와 같이 좀먹었다. 욕설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한 삼 일, 도운이의 대본을 첨삭했다.


말이 이어지지 않는데 이럼 안 되지.

겸손한 마음을 재차 고쳐먹어야 나는 계속할 수 있었다. 너는 하얀색과 검은색 속에서 숨을 자주 쉬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쉼표들을 다 지워버렸다. 저린다. 손목이. 어찌할 수는 없으니까.





Posted by vax
,

1108 null

2017 2019. 11. 7. 12:42

볼 일도 없겠지만 보면 연락해라...

이건 거의 속죄다... 진짜로...




넌 나와 사랑이라는 말도, 느낌도 없이 그토록 천진하게 사랑했었지.¹



 나는 모른 척 앞만 돌아보다 발목을 건드리던 감정이 네 것이란 걸 알아챘었고. 따스하게 추운 감촉이 명랑했던 낯들이 설기 그지없고 그렇다고 감싸들 생각도 없다. 네 눈망울이 선연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모든 낮과 밤마다 네 생각을 했었다. 별의별 생각 좆같은 망상부터 마음 실린 고민까지 네가 좋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썩기라도 할 것처럼. 가벼웠던 적은 없다. 그게 너랑 나에게 치명적이었다. 내가 개새끼인 거 알아. 그래서 짖어대는 것밖에 몰랐지. 물어뜯지 않으면 놓칠 것처럼 몸은 놓아두었지만 마음 귀퉁이를 어느 날엔 중심부를 콱 물고 은근히 씹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미워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염병할 놈의 세상 나기였다.

 아직도, 너와 만나는 자리에 가면 네가 사라져있을 거란 의심을 세 끼 밥보다 강박적으로 챙겨먹고 있다. 목구멍으로 잘 넘기는 연습을 어제 통과했다. 그래도 지독한 배앓이처럼 아프게 하리라는 것은 넘길 수 없다.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오만함이 또 가지를 뻗었다. 단 열매는 도통 열릴 줄을 모른다. 없는 할 말이 목을 쿡쿡 찌른다. 아직도.



거짓말하고 싶다
내 눈은 늘 젖어 있고
나는 개 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캄캄한 새벽
짖어대는 개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금붕어처럼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고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벽에 이마를 대고 말하고 싶다²





황강록, 검고 푸른 날들¹

박연준, 예감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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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ax
,

0215 작고

2018 2019. 11. 7. 12:40

생애 첫 눈, 생애 마지막 눈 - 생애 마지막 눈 합작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연필을 깎아낼 때마다 미덥지 않은 사각거리는 소리와 핏방울이 초침처럼 떨어졌다. 창문이 이따금씩 흔들렸다. 내일 더 추워질 거래. 이불을 더 사야겠다며 장 안을 살펴보고 와선 더 찬 손으로 손을 감싸쥐었었다. 담담한 지금에 와서도 그 때의 안타까움이 얇았던 네 옷자락을 기억한다. 두껍게 입어. 그러면 너는 그랬다. 곧 눈이 올 거야. 그게 다 해결할 것처럼. 그 해 겨울에는 비만 많이 내렸다.

 두꺼운 커튼이 있었는데. 짙은 회색 천으로 투박히 짜여진 큰 커튼이. 손 끝이 차가운 유리에 닿았다. 피가 유리 위에 엷게 맺혔다 투명하게 말라붙는다. 피가 나는구나. 아니다. 창 밖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벌써 몇 년만에 눈이 온다.

 약을 바르는 게 맞는지. 수 번 베인 자국 위에 반투명한 연고를 문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손가락에 들이박는 튜브 입구가 상처를 벌린다. 연고에 붉은 색이 퍼졌다. 반창고 곽을 열어보자 말린 종이 포장만 가득했다. 반창고를 붙이지 않으면 연필에 묻어난다. 너는 연필을 잡고 꾹꾹 눌러쓰지 말라고 했다. 네가 뒤에서 지켜보는 와중에도 연필심이 계속 부러졌다. 그래도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었다. 눈을 두어 번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다. 손 끝 위 가득한 불그스름한 연고가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너는 그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씨보다 내 손놀림을 더 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때도 손톱같은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좋아했던 같기도 했다. 나는 며칠 전에 검은 색으로 열 손톱을 물들였다. 아예 관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 더 창문이 철커덕거렸다. 눈발이 좀전보다 거세졌다. 한기가 더운 방으로 스며들었다. 책상 밑의 싸구려 온열기는 두 번 작은 불꽃을 토해내더니 얌전히 작동을 했었다. 야, 싸구려야. 더워. 발치의 온열기를 툭툭 차도 조절기능이 고장난 기계는 익숙하게 털털거리다 만다. 불 나겠다 싶었던 너는 그 해 가장 추웠던 날 그걸 결국 창고 안에 처박아버렸고 우리 둘 다 몇 년의 추위동안 잊고 살았다.

 햇볕에 발끝이 따스하다 느꼈던 봄날 아침 다시 그것이 생각이 났다. 고장난 그 온열기 있잖아. 잘 있을까. 그 말만 조금 하고선 아무도 먼지를 털고 전원을 켜보려 나서진 않았었다. 겨울은 오지 않을테니까. 맞잡은 손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얕게 드리웠다.

 쓸모없는 것을 위해 창고 열쇠를 쥔 건 근, ···몇 년만이지. 두어 번의 시도 끝에 붉은 빛이 켜졌다. 구부정한 등에 냉기가 스쳤다. 코트를 껴입고 거리를 종종거리던 사람들 사이를 걸어와 거실 구석에 쪼그려앉아 흐릿한 글씨의 설명서를 읽는 사람이었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맞다. 혼자였다.

 내일도 한파가···. 아무 거나 끼워입은 점퍼의 주머니에서 간간히 끊기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눈송이가 천천히 중력에 지고 있다. 너는 그런 표현을 좋아했었다. 이따금 바람이 샘을 내 눈꽃을 하늘 너머로 훔쳐가기도 한다. 따위의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 한 쪽이 영 아파왔다. 추워서인지. 피부가 감각을 잃는 건 새하얗고 아름다운 광경을 더 받아들이기 위함이라고, 그런 건 압도와 가까운 거라고, 네 모습이 네 세상이 흰 눈에 번져가고 있다고··· ···.

 이제 더 이상 눈을 볼 일이 없을 터였다.

 눈의 얘기를 투박한 연필심으로 쓰는 일도 그만두었다.

 내가 눈을 감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Posted by v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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