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이었다. 1학년이었다. 이제 3은 1이 되고 1은 2가 된다. 1과 3이 뱅뱅 맴을 도는 것 같았다. 찬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이렇게 맘과 눈 앞도 시리게 한다는 거다. 첫눈이 송송, 3학년의 회색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회색머리는 웃는다. 까만 머리를 보며 살짝 미소짓는다. 네 키는 일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네. 부럽다. 이제...상관 없지만.


 하늘에서 차가운 눈물이 내렸다. 둘 다 신경쓰지 않으려 애를 쓰며, 힘을 꾹 주며, 말없이 거리를 걸어갔다.







 그것은 이를테면 가랑비였다. 뚝뚝 내리는 빗방울에도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지만, 빨래가 젖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사실 알고 있는 거였다. 다소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 흔들어지는 고개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다. 물자욱을.

 보란 듯이 내리는 비는, 이따금씩 밖으로 조금 새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생각했다. 습관처럼, 우울하게 공터 벤치에 앉아있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것을 따라해 가만히 벤치에 앉아있자 하니, 스가와라에게는 카게야마가 왔다. 그 반대의 상황에 그 반대였던 듯이. 하지만 스가와라는 벤치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느 부분에서는 안락사였다. 스가와라는 처음 안락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거대한 소파와 이불에 파묻혀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미처 뒤는 생각하지 못한 좀 귀여운 발상이었다. 지금은, 조금 지침을 경험한 스가와라는 이제 그 뜻을 알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처럼, 깊이 숨겨지고 덮여져서 바깥 세상 모르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숨이 막혔다. 위험과 고비 정도야 두렵지 않다고 말해도, 설령 맞다손 쳐도, 당장은 움츠러드는 신세였다. 스가와라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맞다는 걸 가장 잘 알고있다.



 




- 카게야마...



 답답해지면 가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속으로 부르고, 소리내어 부르고, 집에도 불렀다. 그래, 집에 불렀다. 그러면 돌아가는 스가와라의 뒤를 카게야마가 쫄랑쫄랑 따라왔었다. 들떠있는 카게야마를 조금 놀려볼 심산으로 걸음을 멈추고, 앞서나가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그때, 해가 지고 노을을 뒤로 한 채 뒤를 돌아보는 너의 모습. 저녁바람이 불어와 사락거리는 너의 짧은 머리카락.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부를 때의 그 목소리만은 깨끗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몸 안에 출렁이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카게야마의 이름은 일렁였다. 아무도 그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뒤를 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도, 살짝 미소짓지도, 대답하듯 선배를 부르는 목소리를 내지도...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외로움이었다. 카게야마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울고있다는 것도, 스가와라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외로움이었다. 스가와라는 울지 못했다. 모두가 그걸 바보같다고 했었다.








- 가는 거죠?

- 가는 거야.

- ...가면서, 안 가는 거죠...?

- 가면서, 못 가는 거야.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 없어.



 스가와라는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눈앞의 입술을 자꾸만 깨무는 카게야마가 신경쓰였다. 입술 생채기 나겠다? 중얼거리는 스가와라의 말에 카게야마는 옅게 웃었다. 너는 날 너무 닮아가는 게 문제야. 스가와라는 웃을 수 없었다. 한 쪽이 울어버려야 멋있는 척 웃어줄 수 있는 건데.



- 가지 마세요.

- 웃어서...가도 된다는 뜻인줄 알았어.

- 선배가 나에게 웃어주던 건 그런 뜻이었나요?

-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렇게 매정하지 못하잖아. 









 어느 순간부터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게 물었다. 후회하세요? 스가와라는 항상 대답했다. 너를 알게 된 건 후회 안 해. 그럼 카게야마는 그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들고있던 공을 만지작거렸다. 사귀게 된 건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는 뜻 같네요. 스가와라는 받아친다. 제법 눈치 빨라졌네? 우리 바보. 그러고 덧붙인다. 그야 네가 너무너무 잘나서 같이 다니기 부끄러우니까. 항상 속으로만 덧붙이던 말을 장난스럽게 내뱉은 건 오늘이 마지막이어서, 였을까. 그 말을 중얼거린 건 벌써 그새를 못 참고 연습을 시작한 카게야마의 동그란 뒷통수를 바라보며, 였는데, 오늘은 스가와라의 앞에는 스가와라의 교실까지 찾아온 카게야마의 당황한 듯한 얼굴이 있었다. 대답이나 의도를 찾는 듯 허둥거리는 게 빤한 표정이었다. 



- 자랑스럽다, 우리 카게야마. 아니, 토비오. 

앞으로 잘됐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다 이뤘으면 좋겠다.

- 마치...이별할 때 하는 말 같네요.

- 굳이 그런 때가 아니더라도 말해두고 싶었어. 꼭 행복하라고. 

- 저는 선배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 그럼 배구는 어쩌고?



 스가와라가 가벼운 웃음으로 다소 격앙된 카게야마의 말을 막았다. 그 다음 말을 알고있었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결코 카게야마에게 좋은 끝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의 대화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마음먹고 돌아선다. 가슴 속 어딘가가 잠깐 뜨거워졌다. 딱 참고 숨길 수 있을 정도만.



- 왜 헤어지려고...하세요?


 

 그래서 예상치 못한 다음 말이 나왔을 때, 스가와라는 잠깐 위험했다. 쉬운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다짐하고 생각해왔으면서도. 천천히, 옅은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 넌 나에게 너무 아까우니까.



 미안해. 가장 중요했던 말은 스가와라의 닫힌 입 안에 갇혀 맴돌았다. 도망가듯 발걸음을 빨리하는 스가와라의 뒤를 따라 소낙비가 쏟아졌다. 뒤를 돌았던 스가와라의 눈가에도 빗방울이 묻어있었을까. 카게야마, 무정하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뒷편의 너는 지금, 울고있을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걸음을 재촉했다. 기껏 다다른 곳이라고는 교실과 그다지 떨어져있지도 않은 체육관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카게야마가 금방 찾아올텐데. 스가와라는 힘없이 잠긴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내일, 누구보다도 큰 꽃다발을 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자신도 기다렸다는 듯 구질구질하게 울고, 매달리면서 카게야마를 떠나갈 수 있을텐데. 빗줄기가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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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 Free! 어린이날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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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야마 토비오 + 나나세 하루카

각 장르 최애들이었는데 내 취향 너무 다 보이는 거 아닌가 이거







바람이 불었다. 천천히 날아들어온 바람에는 바다가 조금 묻어있었다. 부드럽기보다는 까슬거렸다. 모래가 묻었나 싶어 뺨을 조금 훑어보았지만 말라있었다. 눈물이 말라있었다. 언제 울었나 싶었다. 소금기 어린 채 진득하게 눌어붙은 작은 바다는 잘 닦이지 않았다. 별로 상관하고 싶지는 않았다.

 막아줄 것 없는 까만 머리카락이 바다에 실려 잠시 흩날렸다. 그렇게 일렁이며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잡았다. 놓았다.

 자전거를 탔더니 꽤 멀리 왔다. 바다였다. 근처에 있지는 않았던 것같은데. 한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해변이었다.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탁 트인 게 바다인데도 비밀같은 곳이었으니까. 잘 닦인 바람이 선선해 고개를 들었다. 악의없이 밝은 해가 서서히 덥히고 있었다. 멍했다. 새벽에 나왔더니 아침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나와 아무도 없는 여기에 서있다.

 그래봤자 무슨 의미인데, 라는 생각을 참았다. 어제가 떠올랐다.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놓았다.


 그래, 놓았다. 잡은 사람은 없었지만.
잡지 않았다. 받지 않았다. 무시당했다. 져버렸다. 애꿎은 도로의 펜스 하날 걷어찼다. 고개가 내려갔다. 원망과 의문이 땅에 꽂혔다. 오래돼 낡아버린 발만 힘없이 찌그러졌다.

- 애같네.

 다시 들었다. 앞을 보았다. 생생하게 흐릿했다. 흐려졌다. 하지만 보였다. 눈 안에 바다가 사는 아이가 말했다.




1.
바다눈 / 죽은 플랑크톤 따위의 세포로 이루어진 눈과 비슷한 바닷속의 강하물(降下物).





 끌어당기고 있었다. 항상 있었던 것처럼, 천천히 끌려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모래 속에 파묻힌 돌의 끝같은 것에 계속 걸렸다. 몇 번이고 발목이 걸려, 앞으로 넘어져, 놀라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 그저 그대로 넘어져서, 고꾸라져서 바닥에 내 머리카락이 흩뿌려지고, 너처럼 주저앉아, 바다에 갈 수 없구나, 한없이 울고, 주먹이 빨개지도록 치고, 그럴 수 있으면. 몇 번이고 걸려 위험해질 때에도 나는 넘어져지지 않았다. 조절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었다.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내 손을 잡았었다. 잡지 않았다. 절망했었다. 이겨버렸다. 내가.


 나와 같이 맘껏 우는 아이를 만났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울고 있었다. 삼 년동안 울어온 내가 다가갔다. 그 아인 이제 막 눈물지고, 부풀어올라 있었다. 우는 눈이었다.

- 애같네.

 나야말로 울고 있었다.








 토비오는 아직 사람을 대할 줄 몰랐다. 적대적이며 상냥한 방법을 몰랐다. 알더라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를 미워하고 아무도 웃는 낯으로 대했다. 그러다 아이들을 만났다. 상처를 받았다. 아이의 드러난 속의 깜장에 익숙하지 못했다. 언제나 위에 있고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살아와서, 처음 마주했다. 그없이 이대로 갔더라도 결국은 어른 안의 아이를 볼 거라는 걸 몰라서, 그리고 그게 아이라는 걸 몰라서 다칠 거였다. 아무 것도 몰랐다. 마땅한 애였다.

 하루카는 흔들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없지만 강하게 흔들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알 수 없었다. 세계에 지진이 났다. 쩍쩍 갈라진 틈새로 '왜' 가 흘러내리는 걸 망연히 보고 있었다. 다시는 끄집어 올릴 수 없는 깊고 깊은 절벽이었다. 도리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있는 나이였다. 알 수 없는 나이였다. 뿌예진 길을 지나 나 잃어버려졌어요, 하고 누구에게 말해야 했다. 처음으로 아주 어리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는 좀 더 야망있고 애같지 않은가. 생각했다. 생각하는 그것마저 답지 않았다.



 토비오가 바다를 멍하게 바라볼 때 하루카는 그 애를 보았다. 일고여덟쯤 되어보였다. 어린 애가 할 법한 아주 유치한 생각이 났다. 다가갔다. 나랑 놀래?
하루카가 부르자 토비오가 돌아보았다. 눈이 예쁜 애였다. 시기보단 동경이 들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안녕? 그래!





2.
Don't be a child. / 철없는 짓 하지 말아라.
                             / 아이가  되지 말아라.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둘은 서로를 꼭 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아름에 들어오는 어깨를 소중하게 부여안고, 볼을 부비적대고, 한없이 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안아줄 수 있었다. 웃음이 슬슬 피어났다. 둘은 얼마만에 웃는 건지 몰랐다. 동시에 눈물이 뚝뚝 났다. 어깨를 축축하게 만들면서도 누구도 서로의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오랫동안 참은 하루카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토비오가 조그맣게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다 토비오도 울었다. 둘은 울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 라는 말로 달래지지 않는 건 얼마나 골치아픈 것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잔뜩 쌓여있는데도, 좀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 여기 예쁜 꽃 많아.

 하루카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로변을 가리키고, 나서서 꽃을 따 엮어주었다. 동그랗게 이어서 옆에서 쪼그리고 앉은 토비오의 머리 위에 얹었다.

- 왕같아, 꽃나라 왕님.
- 왕?

 응, 하고 하루카는 토비오를 일으켜세우고 그 앞에 앉았다. 백성은 나야.

- 봐, 진짜 왕이지? 왕님, 나한테도 꽃으로 만들어주세요.
- 나 그런 거 몰라...

 토비오는 말을 흐리며 멋쩍게 웃으면서도, 도로 앉아 하늘색 들꽃을 하나 땄다. 딴 꽃을 만지작거리면서 더듬더듬 반지를 만들어 하루카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 다행이다, 반지 만드는 거 안 까먹어서.
- 이 반지, 왕이 줬으니까 뭔가 마법같은 거 없어?
- 마법? 아, 이 반지를 끼면 싸운 친구랑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 짠!

 아까같이 베싯 미소가 튀어나왔다.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환하게 웃어버리게 되었다. 고인 눈물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앞에 있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눈물은 상대의 손에 금방 닦이고,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나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었다.

- 수영 좋아해?
- 공놀이 좋아해?

 마주보고 끄덕였다. 쉬운 거였다. 그냥 느끼는 대로, 우리는 어리니까.

- 제일 좋아해!
- 제일 좋아해!




3.
Lost sea, lost child. 





Posted by v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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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었다카게야마가 1학년일 때, 3학년이었다막 배구부에 들어와 그것 때문에 배구를 거의 관둘 뻔했지만 이차저차 지내다보니 여름이었다여름은 덥고 습하다두 달인가그 전부터별 생각 없이 선배를 바라보던 후배의 눈에 물기를 불어넣고 볼이 뜨거워지도록여름은 뜨겁다.



 카게야마의 여름은 일찍이 4월부터 고개를 들이밀었다입부 전멍하니 손 가는 대로 학교 옆 공터에서 공을 던지던 오후였다바람 빠진 배구공은 철사 울타리에 맞아 흙바닥으로 퍽 떨어졌다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뜻 없이 흘러가는 잡념이 자꾸만 멈췄다전에는 바람 빠지기는커녕 닳기만 해도 제깍 고쳐서 항상 완벽했던 배구공그게 생각나서전성기를 떠나보내고 황혼으로 접어들어 추억팔이로 시간을 때우는 노인의 그것이 떠올라서카게야마는 조금 힘없이 웃었다.


 벤치는 뜨거웠고 그늘은 없었다그런 데에 앉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만은그날은 두 명이나 있을 운명이었나 보다운명그래운명.

카라스노 배구복을 입은분명히 선배가 지나가듯 카게야마의 옆에 앉았다그러든 말든쓸데없는 생각에나 빠져 말도 없고 허공 어딘가를 쳐다보는 카게야마는 별로 반응도 하지 않았다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리는 것도 귀찮았다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였다.


배구 좋아하니?


 이방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타인에게 넘칠 만큼 따스한 그 목소리가 싫었다싫다

 

몰라요.

그래그렇구나난 좋아하는데.

…….

좋아하는 건 좋아하면 돼다른 것들에 휩쓸릴 필요 없어좋으면 좋아해


 그게 내 모토야.



 아그러세요카게야마가 슬쩍 웅얼거렸다햇빛 뜨겁고 구석진 여기엔 왜 온 건지찌그러진 배구공이 다시금 철창에 부딪혀 떨어졌다


미안고민이 있어보여서그나저나 던지는 폼이 좋네여기 고등학교야


 줄기차게 무시당하는 데도 카게야마에게 계속 관심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렇지만 기쁘거나 놀랍기보단 짜증이 더 났다말을 걸면 생각이 든다생각하기 싫으니까 오면 오는 대로가면 가는 대로 잡념에 빠져있는 건데.


 들은 척도 안하니 대화도 끊겼다하지만 완전히 흥미를 끊은 것도 아니다여기라면 사람들이 안 오겠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선배-! 한참 찾았잖아요점심시간에 연습한다니까?

그랬나미안


 또 누군가가 왔다한 명도 귀찮은데 두 명이면 소란스러워져서 두 배로 질색이지만분위기상 첫 번째 방문자를 데려갈 것 같으니 됐다배구를 그만둔 후 조용히 지내려고 좀 외진 학교로 왔는데도 일이 꼬일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예감그래 자꾸 자신을 귀찮게 하던 게 누구인지 얼굴이나 보자싶은 심산으로 고갤 들어 슥 본다는 게눈이 마주쳤다인상 좋아보이는 옅은 회색 머리칼이었다회색머리는 반쯤 끌려가면서도 곧바로 카게야마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야.


 하필 이 작은 데에 배구부가 있는 것부터 불길하더라니.



 정말이지 불안하더라니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는데

 딱히 할 부 활동이 없어 정하지 못한 탓에 불려간 교무실에는 또 그 회색머리가 있었다어떤 선생과 대화하느라 바쁘던 회색머리는 마치 카게야마가 올 걸 알고있었다는 것처럼운명처럼 고개를 튼다.


어라또 보네여기 다니는구나.

.

둘이 아는 사이니그럼 배구부 들어가지 않을래?

?


 한 번의 우연한 악연은 끝끝내 발목도 잡는다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며 카게야마를 뜯어보던 회색머리는 이내 얼굴을 알아봐버렸고지긋지긋한 중학교와 카게야마의 이름까지 기억해냈다


세터였지대회 때 경기 보고 잘한다부러운걸했었는데.

잘됐네그럼 배구부 들어가는 걸로-  

아니요.


 응선생 둘과 회색머리가 놀라 되묻는다


배구그만뒀습니다.

그치만.

생각해둔 부는 있어?

없습니다.


 어영부영 들어가게 됐다어쩌다 보니 손이 이끌렸고어쩌다 보니 회색머리에게 붙잡혀버렸다


아직 내 이름 모르지스가와라 코시야그냥 스가 선배라고 불러


 상대가 어떻게 굴든 그렇게 친절하게 웃어주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카게야마에게서 모든 걸배구마저도 떠나가게 했던 더럽고 오만한 성격인데이렇게 냉랭한 태도의 사람을 끌고가는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 자신마저도 포기한 나한테 왜 이래다정히 말 걸어줄 필요 없어.  


카게야마도 잘하잖아한 번만 해봐.

됐습니다.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아깝네.

그만뒀다고 했잖아요!


 쟁-. 

 체육관에 메아리가 쳤다연습하던 부원들이고 분위기고 다 얼어붙어 스가와 카게야마를 쳐다본다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굳어버린 침묵에 카게야마는 무의식적으로 움찔거렸다.


그게.

미안깜박했네.


 차분하게 대답하고 부장을 안심시키는 저 목소리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다 나가버린 체육관에서 굳이 불러잡아서,


배구 안한다고 했는데 억지로 데려와서 미안해.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네가 좋아하는 걸 했음 좋겠어좋아면 좋아하는 대로 순수하게카게야마가 배구를 다시 했으면 하는 건 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내 말을 잘 생각해봤으면 해.

 

 뭐그렇다고잘 가하는 말을 끝으로 스가는 사라졌다


 아그 시간에서 생각해본 것은치유해 놓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스가를 보아오던 눈빛 안의 마음이었음을.

 꽃샘추위가 가신 후의 열병같은 여름은 쥐도새도 모르게 찾아든다.



                                         *



 추위에 놀라 몸을 싸맬 때는 모르던 것이 비로소 드러난다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아지랑이는 제의 몸부림에 어쩔 줄 모르고아무 것도 못한다.

 그 전에는 몰랐었다스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웃어주는지얼마나 말을 걸며 얼마나 친절하게 구는지설사 카게야마가 말을 걸려 해도 또 다른다른다른 이들에게 잘 대해주느라 기회는 쉽사리 돌아오질 못했다.

 친구가 많다는 건상냥하다는 건결국 모두를 평등하게 생각하는 거였다그것은 다시 말해 누구나 똑같이 관심을 주고 똑같이 웃어준다는 것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스가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처지는 부원들에게 다가가 카게야마에게 했던 만큼이나 진정성 넘치고 따뜻한 말로 보듬어주었다.  

 저것들은 다 거짓이었으면 하는 것도 이젠 소용이 없다그러면 카게야마 본인과 있을 때의 것들도 모두 꾸며낸 것으로만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선배할 말이,

아 미안나 약속이 있어서나 누구랑 할 얘기가 있어서나 좀 바빠서미안나중에 들을게.


 나중은 억만년 동안길고 끝없이 늦다.



 

                                      *




 그러나 나중은 변덕스럽게 닥쳐오기도 한다는 건 몰랐다연습이 끝날 즈음의 늦은 저녁나중은 열대야처럼 화악 불어온다.


카게야마.


 당장에 다른 부원의 무리를 떠나 말을 걸어준 것만으로도 잠을 못 이루기에 충분했었지.


좋아해.

?

좋아한다고그러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늦었으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


 평생 잠 못 이룰 무더위와 불안을 넘겨주고 훌쩍 돌아가버렸다.  

 뭐지?


 알 수 없다하나도아무 것도 알 수 없다그날 만날 기회는 사라져버리고도망치듯 가버린 스가는 부를 수도 없었다그대로 어둠이 찾아들었다짐을 챙기는 손도 그 한 마디에 괜시리 떨리는 듯늘처럼 홀로인 밤길을 걷는 발걸음도 혼란스러운 듯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는 다다르고 아침은 찾아왔다.

 

 밤을 샜다

전화나 메일이 올지먼저 해볼지혹은 학교에서 얘기가 나올지지금은 시간이 늦어서지금은 너무 일러서 등으로 핸드폰만 껐다 켰다 하느라 배터리가 몇 번이고 다 닳아서 행여 연락을 놓칠 세라 간절하게 충전을 했었다그 탓에 정신은 없고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맘으로써는 벌써 수십 번은 3학년 교실 쪽을 기웃거리고 수백 번은 스가에게 말을 걸었지만그저 멍해진 머리로 시간만 갔다.


 그래도 때는 왔다겉으로만 앞을 볼 뿐인 눈은 어지러워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스가의 회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선배.

?

어제 그거그거진짜입니까?

어제?


 차마 고백이라거나 섣불리 마음이라는 단어는 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몇 번이고 쇳소리가 나려는 목을 애써 가다듬는다


-아 어제미안그거 벌칙이었어.

.

선배-. 무슨 얘기 합니까어제?

어제 재밌었죠선배 게임 그렇게 못하는 거 알았으면 벌칙 좀 봐줄 걸 그랬나안한다고 하더니 진짜로 고백해버려서 깜짝 놀랐다구요-?


 장난처럼달뜬 감정은 천천히 부서지고 타는 듯한 더위는 절정에 오른다.





 다 가고 해가 질 시간이었다체육관을 잠근 후 모퉁이를 돌아 가는데그 너머에 있는 식수대에 누가 물을 틀어놓았는지 꽤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잠그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스가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틀었다.

 


 카게야마였다물을 세게 틀어놓고 허리를 굽혀 머리에 물을 맞고 있었다아직 더운 날씨는 아닌데해도 지려고 하는데 미동도 없이 그러고 있었다물이 흘러 입으로 코로 막 들어갔다


아직 안 갔카게야마

뭡니까.

?

뭡니까!!!


 괴로워보였다외치는 소리가 물 흐르는 소리에 막혀 울렸다눈을 꼭 감은 채로 적시고 있었다막연하게 돕고 싶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발도 안 떨어지고 입도 손도 그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뭡니까.


 물이 섞여 누군가는 알 수 없지만본인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지만알 수 있었다카게야마의 눈에서 조금 다른 색의 물이 흘러나온다끊임없는 수돗물에 섞여 이내는 카게야마가 머리를 적시고 그를 숨막히게 하는 게 그 커다란 눈물이 되어갔다안일한 태도로눈 앞을 가리는 건 눈물이 아니라 이 물이야단지 울렁거리고 흐려지는 건흠뻑 젖어가는 머리칼에 가려진 눈이 그렇게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카게야마.


 그때서야 주춤주춤 발이 떨어졌다스가의 다리는 뇌와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갈길 잃고 비틀거리다 이내 넘어질듯 뛰어가 카게야마를 끌어냈다.


괜찮아쉴 수 있겠어?


 물이 들어가 뻑뻑해진 눈을 겨우 뜬 채카게야마는 스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른해뵈지만 멍하게 중얼거렸다.


숨 쉴 수 없습니다.

놔주세요이미 죽었습니다.


주세요

제 힘으로는 선배 품에서 못 나옵니다 놔주세요.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압니다일으켜주세요.

그리고 완전히 죽여주세요.


카게야마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선배

좋아했습니다사랑했습니다.



?



후회 안합니다어쨌든 이제 끝났어요 


너 설마 진짜 죽으려는!

…….

카게야마죽지 마내 말 들어나도 사랑해.


 


 카게야마의 초점 없는 눈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일지도해탈해 모든 것에 무감정한 그에게 피어난 어느 감정일지도 몰랐다스가는 그의 품에 죽음 직전까지 간 젖은 장작의 불씨를 살리는 기분으로 필사적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아니요

선배의 말은 그저 한 생명 살리려는 의사의 그것이잖아요.



 그런 게 아니었다예상한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그건 불신과 자기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오랫동안너무나 오랫동안 혼자서만 사랑해와서아픔과 속앓이를 막으려 생겨난 단단한 껍질이었다바보그런 말을 한다고 널 진짜 사랑해줄 리가 없잖아기대해선 안 돼설레서도 안 돼라고 가혹하게 자신을 치고 또 치는 그 진심의 마음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벅찬 감정을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거짓된 방패를 만드는 동안 곯아버려 수명이 다한 카게야마.



진심으로 모든 걸 바쳐 사랑한다면

게임의 벌칙같은 걸로 고백하지 않습니다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고백이라면

스가선배가 그때 나한테 했던 거짓 발린 사랑의 말에 담긴 것과 같은 양의 진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끼는 후배를 위해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선배가 어떻게 하든 제 마음만큼을 바쳐 죽음을 막을 수 없으니까요.




좋으니까 좋아했어요.

선배도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하세요.


바보야그거 내가 한 말이잖아.


 스가의 팔이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카게야마의 목을 끌어안았다무게가 실려있었다전처럼 무게를 실지 않고 가볍게 팔을 두를 때와는 달랐다담뿍 담겨있었다격앙되고 북받힌 감정으로스가의 어깨밖에 보이지 않는 카게야마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미안미안해카게야마.


 자신과 같은 감정인지그 수없는 미안함이 무엇인지.

 


 옷에 파묻혀 뚝뚝 끊어지게 들려오는 스가는 울고있었다카게야마의 여름에 잠시 우기가 안겨왔다





Posted by v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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