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이었다. 1학년이었다. 이제 3은 1이 되고 1은 2가 된다. 1과 3이 뱅뱅 맴을 도는 것 같았다. 찬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이렇게 맘과 눈 앞도 시리게 한다는 거다. 첫눈이 송송, 3학년의 회색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회색머리는 웃는다. 까만 머리를 보며 살짝 미소짓는다. 네 키는 일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네. 부럽다. 이제...상관 없지만.
하늘에서 차가운 눈물이 내렸다. 둘 다 신경쓰지 않으려 애를 쓰며, 힘을 꾹 주며, 말없이 거리를 걸어갔다.
그것은 이를테면 가랑비였다. 뚝뚝 내리는 빗방울에도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지만, 빨래가 젖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사실 알고 있는 거였다. 다소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 흔들어지는 고개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다. 물자욱을.
보란 듯이 내리는 비는, 이따금씩 밖으로 조금 새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생각했다. 습관처럼, 우울하게 공터 벤치에 앉아있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것을 따라해 가만히 벤치에 앉아있자 하니, 스가와라에게는 카게야마가 왔다. 그 반대의 상황에 그 반대였던 듯이. 하지만 스가와라는 벤치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느 부분에서는 안락사였다. 스가와라는 처음 안락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거대한 소파와 이불에 파묻혀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미처 뒤는 생각하지 못한 좀 귀여운 발상이었다. 지금은, 조금 지침을 경험한 스가와라는 이제 그 뜻을 알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처럼, 깊이 숨겨지고 덮여져서 바깥 세상 모르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숨이 막혔다. 위험과 고비 정도야 두렵지 않다고 말해도, 설령 맞다손 쳐도, 당장은 움츠러드는 신세였다. 스가와라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맞다는 걸 가장 잘 알고있다.
- 카게야마...
답답해지면 가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속으로 부르고, 소리내어 부르고, 집에도 불렀다. 그래, 집에 불렀다. 그러면 돌아가는 스가와라의 뒤를 카게야마가 쫄랑쫄랑 따라왔었다. 들떠있는 카게야마를 조금 놀려볼 심산으로 걸음을 멈추고, 앞서나가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그때, 해가 지고 노을을 뒤로 한 채 뒤를 돌아보는 너의 모습. 저녁바람이 불어와 사락거리는 너의 짧은 머리카락.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부를 때의 그 목소리만은 깨끗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몸 안에 출렁이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카게야마의 이름은 일렁였다. 아무도 그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뒤를 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도, 살짝 미소짓지도, 대답하듯 선배를 부르는 목소리를 내지도...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외로움이었다. 카게야마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울고있다는 것도, 스가와라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외로움이었다. 스가와라는 울지 못했다. 모두가 그걸 바보같다고 했었다.
- 가는 거죠?
- 가는 거야.
- ...가면서, 안 가는 거죠...?
- 가면서, 못 가는 거야.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 없어.
스가와라는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눈앞의 입술을 자꾸만 깨무는 카게야마가 신경쓰였다. 입술 생채기 나겠다? 중얼거리는 스가와라의 말에 카게야마는 옅게 웃었다. 너는 날 너무 닮아가는 게 문제야. 스가와라는 웃을 수 없었다. 한 쪽이 울어버려야 멋있는 척 웃어줄 수 있는 건데.
- 가지 마세요.
- 웃어서...가도 된다는 뜻인줄 알았어.
- 선배가 나에게 웃어주던 건 그런 뜻이었나요?
-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렇게 매정하지 못하잖아.
어느 순간부터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게 물었다. 후회하세요? 스가와라는 항상 대답했다. 너를 알게 된 건 후회 안 해. 그럼 카게야마는 그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들고있던 공을 만지작거렸다. 사귀게 된 건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는 뜻 같네요. 스가와라는 받아친다. 제법 눈치 빨라졌네? 우리 바보. 그러고 덧붙인다. 그야 네가 너무너무 잘나서 같이 다니기 부끄러우니까. 항상 속으로만 덧붙이던 말을 장난스럽게 내뱉은 건 오늘이 마지막이어서, 였을까. 그 말을 중얼거린 건 벌써 그새를 못 참고 연습을 시작한 카게야마의 동그란 뒷통수를 바라보며, 였는데, 오늘은 스가와라의 앞에는 스가와라의 교실까지 찾아온 카게야마의 당황한 듯한 얼굴이 있었다. 대답이나 의도를 찾는 듯 허둥거리는 게 빤한 표정이었다.
- 자랑스럽다, 우리 카게야마. 아니, 토비오.
앞으로 잘됐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다 이뤘으면 좋겠다.
- 마치...이별할 때 하는 말 같네요.
- 굳이 그런 때가 아니더라도 말해두고 싶었어. 꼭 행복하라고.
- 저는 선배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 그럼 배구는 어쩌고?
스가와라가 가벼운 웃음으로 다소 격앙된 카게야마의 말을 막았다. 그 다음 말을 알고있었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결코 카게야마에게 좋은 끝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의 대화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마음먹고 돌아선다. 가슴 속 어딘가가 잠깐 뜨거워졌다. 딱 참고 숨길 수 있을 정도만.
- 왜 헤어지려고...하세요?
그래서 예상치 못한 다음 말이 나왔을 때, 스가와라는 잠깐 위험했다. 쉬운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다짐하고 생각해왔으면서도. 천천히, 옅은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 넌 나에게 너무 아까우니까.
미안해. 가장 중요했던 말은 스가와라의 닫힌 입 안에 갇혀 맴돌았다. 도망가듯 발걸음을 빨리하는 스가와라의 뒤를 따라 소낙비가 쏟아졌다. 뒤를 돌았던 스가와라의 눈가에도 빗방울이 묻어있었을까. 카게야마, 무정하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뒷편의 너는 지금, 울고있을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걸음을 재촉했다. 기껏 다다른 곳이라고는 교실과 그다지 떨어져있지도 않은 체육관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카게야마가 금방 찾아올텐데. 스가와라는 힘없이 잠긴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내일, 누구보다도 큰 꽃다발을 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자신도 기다렸다는 듯 구질구질하게 울고, 매달리면서 카게야마를 떠나갈 수 있을텐데. 빗줄기가 거세졌다.
'2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423 HQ + Free! 어린이날 합작 (0) | 2019.11.07 |
---|---|
150206 2015 스가카게 합작 (0) | 2019.11.07 |
141227 건이 후계자가 아닌 조각 (0) | 2019.11.05 |
141230 [쿠로켄]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0) | 2019.11.05 |
150421 [카게야마 토비오] 혜성 (0) | 2019.11.05 |